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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러디 슈어] 100의 마음 上

예~전에 짧게 날림으로 써 놨던 거를 파일 정리하다가 발견(^ ^;) 따로 외전으로 낼 만한 이야기는 아니라서.. 저 혼자 보려다가 여기에만 슬쩍 올려 봅니다. 부끄럽지만 재미있게 봐 주세요.


이영 시점이고, 이영해주의 뒷이야기입니다. 

래언이랑 윤성이도 조금씩 등장해요. 본편 완결 시점으로부터 일이 년 지난 후.

언젠가는 뒷이야기를 이어 보겠습니다... 투비껀띠뉴. 





 

 

100의 마음 





1.

나는 시집을 읽어본 적 없다.

어린 시절 큰오빠가 읊어주었던 동시 몇 편만 아주 흐릿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그래도 예쁘고 가슴을 울리는 말을 시적이라고 부른다는 건 안다. 해주의 언어는 시 같았다. 해주의 입술이 만들어내는 그 모든 음절이.

아름다웠다.

내가 아직 어릴 때 세상이 사라졌다. 기억 속에 존재하는 장면은 대부분 잿빛이다. 그럼에도 아름다움을 떠올릴 적엔, 여전히 옛 세상의 조각을 매만지게 된다.

일곱 살. 어둠이 치 떨리게 무섭던 시절이었다.

침대 옆벽에는 큰오빠가 붙여준 야광별 스티커가 별자리처럼 무리 지어 있었다. 매일 스티커를 손끝으로 더듬다가 잠들었다. 그게 진짜 별이 아니란 것도, 나에겐 야광별 스티커보다 내 손을 잡아줄 어른이 필요했단 것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래도 깊은 밤 그것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해주의 목소리를 들을 때면 종종 그 희미한 야광이 떠오른다.

작고 허술했던 푸른 빛. 쉼터의 밤하늘과 비교하면 한참 초라할 텐데도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사소하고 일상적이지만, 위안이 되는.

해주의 언어가 그러했다.

“잘 잤어?”

아침에 일어나서 늘 해주는 인사.

“다치지 마.”

쉼터 밖을 나갈 때면 매번 하는 말.

“언니.”

매일 같이 듣는 호칭.

그 음절에 섞여 있는 자그마한 숨결. 작은 눈짓. 특별할 것이라곤 없었다. 희미한 야광별처럼. 나는 깊은 어둠이 쉼터에 내려앉으면 어린 날처럼 나의 야광을 손끝으로 더듬는다. 야광이 간지럽다는 듯이 웃는다.

하지 마. 간지러워.

그러다 보면 잠들 수 있다. 머나먼 곳에서부터 바람이 실어다 주는 기괴한 괴물의 울음소리 따위는 말끔히 지워진다. 숨 쉴 수 있고, 살아갈 수 있다. 무서운 것은. 없다.





2.

“이영아.”

큰오빠가 날 부른다.

“이리 와봐.”

“왜?”

“칼 갈아 줄게.”

“내가 할 수 있어.”

“내 거 하는 김에 네 것도 해 주려고.”

날이 많이 풀렸다. 큰오빠는 얼마 전에 겨우내 길렀던 머리를 잘랐다. 목선이 드러나서 훨씬 잘생겨 보인다고 했더니 그런 말 하지 말라며 타박했다. 칭찬을 받을 줄 모르는 성격이다. 좀 지나치게 딱딱한 게 아닌지.

큰오빠에게 칼을 건네고 옆에 쪼그려 앉았다. 힐금 곁눈질하니 큰오빠의 옷 소매 아래로 무언가가 보인다. 예전 세상에서나 볼 법한 팔찌였다.

“이게 뭐야?”

“어… 팔찌.”

본인이 직접 구해다 하실 위인은 아니고, 누가 준 것인지는 빤했다.

“작은오빠가 줬어?”

큰오빠는 다시 묵묵하게 칼을 갈았다. 대답이나 좀 하지. 삭, 삭, 규칙적으로 퍼지는 소리는 듣기 좋았다. 오빠가 입을 힘주어 꾹 다문다. 난감할 때마다 저 표정이다. 팔꿈치로 오빠의 등을 쿡 찌르며 물었다.

“부끄러워?”

“…아니?”

단박에 부정해놓고 귀 끝은 붉다.

“안 봐도 뻔하네. 작은오빠한테 우리가 애도 아니고 뭐 이런 거를 어쩌고저쩌고…. 그랬지?”

“그만.”

“그만, 뭐.”

큰오빠가 말을 돌리며 칼을 건네주었다.

“자. 다 됐다.”

몇 년을 같이 지내면서도 남들한테 작은오빠 이야기하기를 저렇게 부끄러워한다. 내가 작은오빠라면 엄청 섭섭할 텐데.

“나도 해주한테 뭐 해주고 싶다.”

“주면 되지.”

“다음에 시내 들어갈 때 나도 데려가 줘.”

“그건 안 돼. 시내는 아직 무리야.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 오빠가 가져올게.”

“내 눈으로 보고 직접 고를래.”

“고집부리지 마.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오빠가 고르는 건 못 믿어.”

“그러면 래언이한테 부탁해.”

“그래서 말인데 작은오빠 어디 갔어?”

“물 뜨러.”

“왜 같이 안 가고?”

“뭐… 종일 붙어 다닐 필요는 없지. 애도 아니고.”

내가 주먹으로 어깨를 툭 치자 오빠가 얼떨떨하게 나를 돌아보았다.

“만약에 해주가 이렇게 말하면 난 너무 섭섭할 것 같아. 울지도 몰라.”

“이게 왜.”

“남들 앞에서도 나에 대한 사랑을 과시해 줬으면 좋겠거든.”

큰오빠가 고개를 내젓더니 한숨을 내쉰다. 예전에는 내가 이럴 때마다 한마디씩 하더니 이제는 포기한 모양이다.

“사랑이란 그런 거야. 수백 번 확인받아도 부족한 거라고.”

“그래. 연애 고수 나셨네. 내가 몰라봤네.”

“오빤 좀 반성해야 해. 애정 표현이 너무 야박해.”

“이래언은 별말 없던데.”

“그거야 작은오빠가 을이니까 티를 안 내는 거겠지. 난 알아. 이해해.”

“걔가 왜 을이야.”

“더 좋아하는 쪽이 을이야. 그래서 나도 을이잖아.”

“근데 너 을이란 단어는 어떻게 알아?”

“미래 언니한테 배웠어. 이렇게 쓰는 거 맞지?”

큰오빠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지었다.

“뜻은 맞는데… 사용할 대상이 잘못됐어. 이래언이 무슨 을이야.”

“아니야?”

“동등한 관계지. 너는 왜… 해주가 뭐 섭섭하게 구니?”

본인 태도나 반성하시지, 속삭이는 목소리에 걱정이 한가득 섞여 있었다.

“아니. 해주는 나한테 늘 잘해 줘. 그냥 내가 더 좋아하는 거지.”

오빠는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이런 목석같은 남자를 붙들고 내가 무슨 이야기를 더 하겠나 싶어 김이 빠지려는 찰나. 때마침 작은오빠가 터벅터벅 걸어왔다. 양손에 들린 낡은 수통에는 물이 가득 담겨 있었다. 넓은 보폭으로 순식간에 우리 앞까지 다가와서는 큰오빠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무슨 일 있어요?”

큰오빠는 바지에 묻은 흙은 탈탈 털면서 벌떡 일어섰다.

“별일 없는데, 왜.”

나는 쪼그려 앉은 채로 무릎을 팔로 감쌌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니 둘 다 산처럼 높다. 지켜보는 재미가 있다. 작은오빠의 짙은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저기서 보는데 형 표정이 이상하길래.”

“내가?”

“별일 없으면 다행이고요.”

“없어.”

한참 큰오빠를 들여다보던 작은오빠가 뒤늦게 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해주가 부르더라.”

“응.”

나도 옷에 달라붙은 흙먼지를 탈탈 털며 벌떡 일어났다. 작은오빠가 알려준 방향으로 뛰어가기 직전. 괜히 주먹으로 큰오빠 등을 한 대 퍽 쳤다.

“아!”

오빠가 억울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봤다.

“바보.”

하여간 더 사랑받는 사람은 아무것도 모른다.

“이영이 너 오빠한테 그게 무슨….”

와락 얼굴을 구기며 혼낼 기세기에 잽싸게 도망갔다. 내버려 둬요. 사춘기잖아요…. 희미하게 작은오빠의 목소리가 들린다. 웃겨. 사춘기 지난 지가 언젠데. 둘 다 아직도 날 애 취급이다.

나는 쉼터 안에 있는 해주에게로 뛰어가면서 계산식을 떠올렸다. 그러니까 이런 거다. 각자 지닌 마음의 한도가 있다면, 나는 100의 사람이고 해주는 10의 사람이다. 해주도 나를 힘껏 사랑하겠지. 본인이 지닌 최대치로. 그래봤자 10이다. 난 애쓰고 애써서 절반만 사랑해도, 50인 거다! 무려 40의 격차가 생기니 나는 항상 을이 될 수밖에 없다. 요즘 내린 결론이다. 불쌍한 나.

오빠들 사정도 그리 다르지 않으리라. 불쌍한 작은오빠.

해주는 늘 침착하고 감정 기복이 적다. 무언가에 깊이 몰입하는 편이 드물다. 세상 그 어떤 것도 해주를 뒤흔들거나 무너뜨리지 못한다. 형체 없는 마음 따위에는 더더욱.

그에 반해 나는 조금 미친 사람 같다. 실제로 미쳐 있던 적도 있으니까. 무언가에 빠지면 감각이 마비되는 게 분명하다. 슬플 때 나는 오열하며 악을 쓰고 이것저것 때려 부순다. 해주는 입을 꾹 다물고서 허공을 노려볼 뿐이다. 기쁠 때도 나는 웃다가 감정에 북받쳐서 엉엉 울고 마는데, 해주는 싱긋 미소만 짓는다.

해주는 날 좋아하고, 난 해주를 사랑한다.

해주는 정상인이고, 난 미친놈이다.

해주는 10, 나는 50… 이면 좋겠지만 이미 100.

평생 사랑해 본 경험이라고는 한 번뿐이지만, 쉼터의 어른들에게 이것저것 주워들어 사랑이 무엇인지 대충은 안다.

너무 사랑하면 문득 화가 나고 슬퍼진다. 사랑은 아름답지만 비참한 행위다.

나를 살렸다가 나란 존재를 힘껏 짓뭉갰다가. 빵빵하게 부풀렸다가 납작하게, 아주 얄팍하게 만들었다가.




3.

“오빠한테 혼날까?”

“당연하지.”

작은오빠가 얼굴을 슬쩍 찡그리며 낮게 신음한다. 자경대가 시내로 나가는 날이었다. 나는 작은오빠의 지프에 몰래 올라탔다. 바짝 몸을 엎드리고 숨어 있다가 지프가 쉼터를 완전히 떠났을 때야 짜잔, 등장했다.

앞 좌석에 앉아 있던 작은오빠와 지광 오빠는 대번 기겁했다.

“너 여기 온 거 누구누구 알아.”

“아무도 몰라.”

“형한테 한 소리 들을 거야. 어쩌려고.”

작은오빠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하자, 옆에서 지광 오빠가 열심히 맞장구를 친다. 나는 편히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어깨를 으쓱했다.

“돌아가려면 돌아가든가. 기름 아깝게.”

차에 넣을 기름은 한정적이다. 도로에 버려진 차에서 기름을 빼 쓰는 것도 곧 한계에 달할 것이다. 차 한 번 굴릴 때마다 다들 달라붙어 가장 기름을 덜 쓰고 갈 수 있는 최적의 루트를 짠다는 걸 안다.

나 하나 다시 쉼터에 데려다 놓겠다고 핸들을 돌리는 짓은 안 할 거다.

“…왜 따라왔어.”

작은오빠가 한숨을 쉬었다.

“왜 따라오면 안 되는데? 나도 자경대에 들어갈 수 있는 나이야. 다른 사람은 되고 난 안 돼? 쉼터에서 나만큼 총 잘 쏘는 사람도 없잖아.”

“…….”

“큰오빠 빼고.”

“이영아.”

“나 보고 호신술도 잘한다며. 오빠들은 과보호가 너무 심해.”

“다 널 생각해서 그러는 거야.”

“나도 알아. 하지만 이러다간 영영 쉼터에 갇혀서만 지낼걸. 나도 다른 사람들을 위해 할 일은 하고 싶어. 요리나 치료는 내 적성에 안 맞아. 알잖아.”

작은오빠는 대꾸하기를 포기한 듯했다. 인력 하나하나가 아쉬운 상황이다. 큰오빠는 예전 세상 기준으로 내가 아직 미성년이니 물러나 있으라고만 한다. 웃기는 소리. 그렇게 예전 세상의 기준을 따질 거면, 작은오빠랑 사귀기는 왜 사귀어? 가족인데. 라고 했다가 큰오빠가 울 것 같은 눈을 하길래 더 따지지는 않았지만…. (조금 심했다고는 생각한다.)

아마 지금의 나는 열일곱 정도 됐을 거다. 이런 세상에서 전력으로 쓰기에 충분한 나이였다.

“따라와서 뭐하려고.”

작은오빠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크게 몰아붙이는 법 없었다.

“이렇게라도 나가지 않으면 큰오빠가 영영 허락 안 해줄 것 같아서.”

“네 그런 성격은 누굴 닮은 건지.”

작은오빠가 혀를 차며 핸들을 꽉 쥔다.

“뭐. 내가 왜.”

“형은 신중하잖아.”

“내가 신중하지 않단 소리야?”

“…….”

“난 누구보다 신중하게 생각해서 따라온 거야! 몇 번의 고심을 거쳐서 내린 결정이라고.”

어이없어, 정말. 전력에 누가 되는 일 없도록 자경대 창고에서 총까지 알뜰하게 챙겨 왔는데. 총을 보여주자 작은오빠는 입만 꾹 다물고 운전에 열중했다. 대신 지광 오빠가 휙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영아. 그런 건 챙겨 온 게 아니라 몰래 훔쳐 왔다고 하는 거야.”

“맨몸으로 따라오는 것보단 낫잖아?”

“에휴.”

“그 괴물들이랑 잘 싸울 자신 있어. 걱정하지 마.”

잠자코 침묵을 유지하던 작은오빠가 툭 말을 던졌다.

“싸울 일 없어. 절대로. 안전하게 수색만 하고 나올 거다.”

여기서 오빠를 더 자극했다가는 정말 크게 혼날 것 같았다. 내가 다른 건 몰라도 분위기 하나는 잘 읽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잠자코 있었다.

흙길을 달리던 지프는 곧 아스팔트 도로와 만났다. 한참 전에 버려진 차들 사이를 이리저리 뚫고 나아간다. 차체가 휙휙 방향을 바꾸는 통에 멀미가 약간 났다. 애처럼 보일까 봐 멀쩡한 척했다. 간간이 숨을 꾹 참으면서.

시내에는 이런저런 생활용품이 많다고 들었다. 생활에는 크게 도움 안 되지만, 신기한 것들도. 가끔 수색을 나갔던 자경대원들은 일종의 그런 사치품을 손에 쥐고 돌아왔다. 작은오빠가 큰오빠에게 주었던 팔찌 같은 것들.

운이 좋으면 나도 해주에게 줄 만한 선물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멀미와 설렘이 뒤섞여 심장이 울렁거렸다. 손끝으로 무릎을 더듬다가, 총을 다시 한번 살폈다. 이상 무. 싸울 준비는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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